Chapter Text
똑똑, 찾아올 이가 없는 늦은 밤의 노크는 갑작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한밤의 여유를 기대하며 한껏 풀어져 있었던 테랑스의 정신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머릿속에서 튀어 오르는 각종 가능성을 일단 눌러둔 테랑스는 모서리가 각진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이어지는 목소리는 없었다. 대신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이 열린다. 그 시점에서 테랑스는 뻣뻣해졌던 등줄기의 긴장까지 풀며 픽 웃었다. 성용기사단 병사가 지키고 있는 친위대장의 신황궁 내의 개인실 앞에서 별 소란도 없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테랑스, 여전히 늦게 자는구나.”
문이 열렸다 닫히는 틈을 흘긋 눈짓하니 디옹이 달고 온 사병은 없다. 그렇다면 급한 공적인 목적의 방문은 아니고, 지금껏 몇 번 그랬듯 테랑스와 여유롭게 사적인 밤 시간을 보내려는 심산일 테다. 테랑스는 등줄기에 남았던 조금의 긴장까지 풀어내며,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디옹에게 가까이 서서 망설이지 않고 그를 안았다.
“그러는 디옹도 아직 잘 시간은 아니잖아.”
“그렇긴 해도 외출복도 아직 벗지 않았을 줄은 몰랐지.”
“뭐, 곧 잘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쿡쿡 웃으며 디옹이 테랑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당겨 몇 번 키스했다. 애정 표현을 마친 디옹이 품에서 물러 나왔고, 그의 시선은 곧 테랑스의 방을 훑었다.
“무얼 하던 중이었어?”
“차를 준비하고 있었어.”
“차?”
마침내 디옹의 시선이 사이드보드 위에 놓인 주전자에 닿았다. 그는 마치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양, 수수하고 낡은 주전자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최근 밤에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습관이 들었거든.”
“시종에게 시키지 않고 네가 직접 내리는 건가?”
“직접 내리는 게 꽤 재밌어.”
테랑스가 먼저 사이드보드를 향해 걸었고, 디옹이 따라와 곁에 섰다. 준비하려고 막 꺼내어 두었을 뿐인 주전자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고, 차통도 나와 있지 않았다. 오늘 마실 차는 생각해 두었다. 그러나 테랑스는 손을 뻗어 그 차통을 꺼내 오지 않고 디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디옹은 주전자를 잡은 테랑스의 손을 바라보다가 테랑스를 돌아보았다.
“차를 내리는 너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테랑스가 정식으로 디옹의 종자가 되기 전 훈련을 받을 때, 상류 문화에 맞게 차를 우리는 법도 배웠다. 몇 번의 훈련을 거치고 연습해 본 후에 ‘차를 내려드릴까요?’ 하고 디옹에게 먼저 청했고, 그 후로 테랑스가 디옹에게 차를 올리며 둘이서 티타임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디옹이 황족이 되고 더 많은 시종이 따르게 되면서 테랑스가 할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내가 마실 차도 부탁해도 될까?”
“물론.”
어릴 적부터 둘이 가졌던 티타임은 저뿐만 아니라 디옹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테랑스와 마찬가지로 순간 추억에 젖었을 디옹이 차를 청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차통을 꺼내지 않았는데, 역시나. 테랑스가 빙긋 웃고 천천히 디옹의 곁에서 물러나 작은 화로에 크리스털로 불을 붙이고 물을 데웠다.
테랑스가 하는 것을 디옹이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꼈다. 재미있을 만한 일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테랑스는 이것조차 안다. 저 역시 수백 번은 본 디옹의 행동이 재미있어 마냥 바라볼 때가 있으니까.
적당한 온도로 끓인 물을 옮기고 사이드보드 앞에 서자, 한 걸음 더 가까이 선 디옹이 무슨 생각이라도 든 양 테랑스의 뒤로 이동하더니 허리를 감싸고 안아 몸을 붙이며 어깨에 턱을 대고 테랑스가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제는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는 아쉬웠던 모양이지. 킥킥 웃자 디옹도 따라서 웃는다. 등 뒤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다 테랑스가 팔을 움직이자 디옹이 그 팔에까지 따라붙었다. 팔을 붙이듯 대어 테랑스의 손등에 손바닥을 대고 손을 겹쳐서는, 테랑스가 하는 행동을 따르기라도 하듯 따라다닌다. 디옹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 움직임은 둔해졌으나 테랑스는 아주 기꺼이 평소보다 더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테랑스의 손이 차통을 넣어 둔 찬장을 향해 문을 열자, 어깨에 닿아 있던 디옹의 고개가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많지는 않은 통을 훑던 그의 시선이 맨 오른쪽에 있는 것에 멈췄으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제법 사치스러운 물건이 있구나, 테랑스.”
마치 의외라는 듯, 모르는 부분을 발견했다는 듯 순식간에 아주 흥미로워진 그의 목소리가 익살맞았다. 디옹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구하기도 어려운 고급 차다. 황족에게 납품하는 상품이기도 했다. 테랑스의 손이 느리게 그쪽으로 이동했다.
“아직 마셔 본 적은 없어.”
“그래? 아끼는 물건이야?”
아낀다고 해야 할까…. 테랑스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말하자면 아끼는 것이 맞기도 했다.
“혹시 이런 날이 있을까 하여 준비한 물건이거든.”
내가 차를 마시는 깊은 밤에 네가 내 방에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는 날. 몇 년 전이라면, 그를 향한 일방적인 감정을 품었던 때라면 생길 리도, 생겨서도 안 되는 날이므로 어떤 기대와 꿈을 짓밟기 위해서라도 절대 준비하지 않았을 물건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토록 네가 쉽게, 당연하단 듯 만들어주는 날이니까. 그리하여 얼마 전에 구해두었던 차다.
“나를 위한 거야?”
“응.”
굳이 얼굴을 돌려 눈을 쳐다보지 않았으니 디옹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생각에 잠긴 양 아무 말이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네가 즐겼어도 좋았을 텐데.”
“내가 즐기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흘러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기뻐하기보다는 조금 뚝뚝했다. 테랑스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디옹은 종종 테랑스가 저의 힘을 빌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사치를 즐기지 않을 때 속상해하곤 했으니까.
“궁금했다면 내게 부탁했어도 됐고.”
“비싼 차가 궁금했던 건 아니고, 이걸 준비한 건 네가 이 차를 좋아해서야. 네가 좋아하는 걸 준비해 두고 싶었거든.”
귓가에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보지 않아도 디옹의 얼굴이 결국 미소를 그렸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는 결국 테랑스의 사랑이 저에게 향하는 걸 달가워하니까. 그렇다면 디옹은 오늘은 이 차를 마시려나… 하고 생각한 테랑스의 손이 맨 오른쪽을 향해 옮겨간다. 그때, 손등을 감싼 디옹의 손에 힘이 들어가 테랑스의 손을 쥐고는 반대쪽으로 옮겼다.
“그런 이유라면, 오늘은 다른 걸 마시고 싶어.”
“응?”
이건 예상 밖이다. 테랑스는 결국 고개를 돌려 아주 가까운 디옹의 눈과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고 싶으니, 오늘은 평소 네가 즐기는 차를 대접해줘.”
“아… 아마 네 입에는 맞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더 즐거울 것 같군.”
디옹은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그의 속내를 알 것 같아, 약간 홧홧해진 얼굴을 얼른 돌리고는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면서도 괜히 차통 사이에서 마치 무언가를 고르듯 손을 움직였다.
이제 테랑스는 디옹에 관한 많은 걸 안다. 디옹의 취향도, 디옹의 호불호도, 디옹이 기뻐하는 순간도, 저를 향하는 그의 사랑도. 그러나 여전히 참 낯선 일이다. 네가 날 사랑함을 실감하는 것은… 감사하고 기쁘나 여전히 믿을 수 없고 벅찬 일이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최근 즐기던 차 중에 조금이라도 디옹의 입에 맞을 만한 것을 골랐다. 향이 풍부하고 맛이 가벼운 차를 즐기는 디옹에 비해 테랑스는 향이 흐리고 둔하며 맛이 무거운 것을 즐겼다. 형편이나 계급상 그런 차를 고르는 쪽이 금전적으로 어울리기도 했지만, 모른다. 제 품에 지나칠 정도로 향기로우며 사치스러운 사람이 있어서 더 이상은 즐길 수 없는 것일지도.
디옹과 함께 두 잔의 차를 내린 후, 각자 하나씩 들고서 작은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디옹은 테랑스가 오늘 읽을 요량으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책을 내려다보았고, 빙긋 웃었다.
“실은, 얼마 전에 네가 추천한 책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실은, 디옹이 막 방에 들어섰을 때 얼굴을 보고 예상한 것과 같았다. 아마 오늘은 연인으로서 저를 찾아온 것은 아닐 듯하다는 예상 말이다. 추천했던 책은 제법 첨예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니, 저와 디옹의 가치관을 생각하면 의견이 꽤 갈렸으리라. 차를 즐기기는커녕 어렸을 때 몇 번 그러했듯 논쟁에 가까운 독서회를 했을 테다.
하지만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디옹에게서 아까와 비슷한 빛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눈앞의 디옹은 의심할 수조차 없는 테랑스의 연인의 얼굴이었다.
“책 이야기는 다음에 할까?”
그리하여 테랑스가 먼저 웃었다. 디옹은 소리 내어 답하지 않고 더 길게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다. 차를 더 마시는 디옹을 보고 테랑스도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향기로웠다.
